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문단 편집) == 임 가밀로 [[신부(성직자)|신부]] == [[파일:external/info.catholic.or.kr/%EA%B0%90%EA%B3%A1%EC%84%B1%EB%8B%B9_%EC%9E%84%EA%B0%80%EB%B0%80%EB%A1%9C%EC%8B%A0%EB%B6%80%ED%9D%89%EC%83%81_SH107156.jpg]] [[프랑스어]] 본명은 카미유 부이용(Camille Bouillon). 초대 본당 주임신부였으며 51년 동안 [[한국]] 땅에서 생활하며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임 가밀로 [[신부(성직자)|신부]]는, [[루르드의 성모|루르드]]에서 조금 떨어진 타브르 교구 출신의 신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며 독실한 [[성모]]신심으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성품성사|사제서품]]을 받자마자 다음 해에 바로 [[조선]]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었다. 발령이 나기 전 [[오지(지리)|오지]][* 당시를 생각하면 [[조선]]은 오지였긴 했고, 박해가 활발하던 시절에는 외국인 신부들 사이에서는 [[순교]]하러 가는 땅(…)이란 소리도 들었다.]로 가는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가르멜 수도회|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가서 기도했는데, 그 때 [[리지외의 테레사]](통칭 소화(小花. '''작은 꽃''') 테레사) [[수녀]]와 만나 영적 남매 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꾸준히 이어져, 그녀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성녀]]로 시성된 후, 소화 테레사의 성상을 감곡 성당 내에 모시기도 했다. 그 성상은 지금도 감곡성당 내에 있다. 부임하고 신자들에게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라는 명언을 했다. 먼 이국 땅으로 가는 아들을 위해, 임 가밀로 신부의 어머니는 선물로 '''[[파리의 성모|기적의 패]]'''[* [[파리의 성모]] 발현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만들어 착용하라고 지시한 패.]를 한 보따리 안겨주며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임 가밀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직접 제작한 [[루르드의 성모]]상과 기적의 패를 한 보따리 들고 조선으로 입국했다. 전술한 것처럼 여주 부엉골에 부임한 임 가밀로 신부는 [[민응식]]의 집을 보고 성당을 세울 결심을 하지만, 당시 권력과 부를 손아귀에 쥔 민응식은 상상도 못할 가격을 불렀다. 아예 팔지 않겠다라고 거부 의사를 보인 것, 이에 돈이 없는(…) 임 가밀로 신부는 "저 땅에 성당을 세우게 해서 당신께 봉헌하게 해 주십시오!!"라며 [[성모 마리아]]께 청하면서 밤에 몰래 '''민응식의 집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건이 일어나며 민응식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땅을 팔게 되었고,''' 이것은 거래문서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땅을 얻어 신이 난(…) 임 가밀로 신부는 즉시 [[성당]]을 지었다. 짓기 시작할 때는 "강북에는 [[명동성당]], 강남에는 감곡성당"을 모토로 명동성당과 똑같이 지으려고 했으나, 짓는 도중 [[일본 제국|일제]]가 자재를 공출해 가면서 훨씬 작은 모습이 되었다. 마치 명동성당의 자식 같은 느낌으로, 외양은 똑같지만 크기는 아담하다. 임 가밀로 신부의 독문무공이자 절세신공(…)인 '''기적의 패 땅에 심기'''는 이후 일제가 성당 뒷동산에 강제로 [[신사(신토)|신사]]를 세우려고 하던 때에도 발휘되는데, 일제의 만행을 본인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자 임 가밀로 신부는 '''"당신께서 주셔서 [[성당]]을 지어 봉헌한 거룩한 땅이니, 당신께서 지켜 주십시오!!"'''라고 하며 또 밤에 몰래 신사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 신사 공사만 하려 하면 야생동물들이 떼거지로 나타나 방해하거나, 억수같은 비가 내리거나, 인부의 팔·다리·손가락(…) 등이 부러지는 안전사고들까지 겹쳐 공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신사 공사는 철회된다.''' 복지부동의 표본을 보여주던 [[일제강점기]]의 [[가톨릭/대한민국|한국 천주교]]에서도 임 가밀로 신부는 '''핍박받는 조선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고,''' 이에 [[서대문형무소]]에도 3번이나 수감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명목상 [[프랑스]]와 [[일본]]이 동맹이었기에 그 이상의 처분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프랑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임 가밀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성모몽소승천|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죽게 해 주시오."'''고 말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임 가밀로 신부는 칼을 찬 [[일본제국 경찰]]들과 함께 감곡성당으로 돌아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가 끝나고 엉엉 우는 신자들 앞에서 [[일본제국 경찰]]들이 칼을 빼들었는데… 돌연 성당 문이 벌컥 열리며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신부님!! 사셨습니다!! 조선이 [[8.15 광복|해방]]되었어요!!!''' 성모승천대축일이 포인트. 임 가밀로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게 해 달라고 한 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영화가 따로 없다. --그런데 [[미사]] 끝나고 성당 문 열고 들어왔다던 청년들아, 너희들은 미사 참례 안 하고 어디 갔었냐(…). 설마 11시 교중미사였나?--[* 신자들만 알 수 있는 얘기(?). 대축일에는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례해야 하기에, 신자들의 밀집도가 장난이 아니다. 어지간한 작은 규모의 성당도 신자들이 본당을 꽉 채우는 경우가 부지기수. 그래서 그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으니까, 주일미사 때처럼 대축일도 연령별로 시간대를 나누기도 한다. 게다가 교중미사는 보통 점심 직전에(11시경) 시작하고, 본당주임신부가 직접 집전하며, 이것저것 꼼꼼히 규정대로 하다 보니 한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렇게 되면, 정오에 항복방송이 나왔는데 당시 통신 미비로 걸리는 시간차를 감안하면, 대충 들어맞는다.] 목숨을 건진 임 가밀로 신부는 그 뒤 2년간 더 사목하다가 1947년 10월 25일, '''"성모님, 저를 구하소서!!"'''라는 유언과 함께 사망했다. 유해는 성당 인근 야외에 모셔젔다가 83년에 성당 내 벽제대 아래에 모셔왔다. [[광복]] 소식을 들은 임 가밀로 신부님은, 그동안 숨겨왔던 [[태극기]]를 꺼내 성당에 게양했다고 한다. 다만 사진으로만 있고 실제 태극기는 사라졌다고 한다. 위에 적힌 [[서대문형무소]]와 사형에서 [[http://www.cpbc.co.kr/CMS/tv/program/preview_body.php?menu_fid=3427&cid=289960&path=200904&return_url=%2FCMS%2Ftv%2Fprogram%2Fpreview_list.php%3Fselect%3D%26textfield%3D%26program_fid%3D3385%26menu_fid%3D3427%26gotoPage%3D&gotoPage=|살아난]] [[http://www.cpbc.co.kr/CMS/tv/program/view_body.php?menu_fid=3428&cid=259686&path=200807&return_url=%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select%3D%26textfield%3D%26program_fid%3D3385%26menu_fid%3D3428%26gotoPage%3D1&gotoPage=1|이야기는]] 성령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널리 퍼진것으로 보인다. 다만 [[http://www.maegoe.com/main/?skin=11.html|감곡매괴성당 홈페이지]]와 cpbc 특집 다큐 [[https://youtu.be/iB6BtYLjIXo|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서대문형무소에 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ia|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을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